파리는 여러 번 지내 본 도시지만 팬데믹 이후의 파리는 그 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네요. 거리마다 생기 넘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고, 어느 누구도 마스크 따위는 쓰고 있지 않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세계를 얼어붙게 했던 바이러스의 존재는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화상 회의를 통해 간간이 만나던 해외의 친구들을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일도 몇 번 경험했는데, 이 모든 것이 익숙하면서도 생경한 풍경으로 다가왔습니다.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는 말처럼 내가 지금 있는 곳이 현실인지 가상인지, 혹시나 몇 년 전 과거로 돌아간 것은 아닌지 잘 파악이 되지 않더라고요.
도시를 새롭게 느끼기 위해 택한 방법은 바로 '걷기'입니다. '가장 철학적이고 예술적이고 혁명적인 인간의 행위'라고 리베카 솔닛이 정의한 것처럼 공간을 파악하기 위한 가장 원초적이면서 몰입적인 방법은 직접 두 발로 것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미팅과 미팅 사이에 그 유명한 파리의 메트로를 타거나 우버를 불러 타는 것이 아니라 마냥 걷기 시작했습니다. 하루에 평균 10km 정도는 걷게 되더라구요. 걸으면서 사람들의 움직임을 보고 그들의 생각과 감정이 담긴 언어의 소리를 듣습니다. 그제서야 내가 있는 곳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저번 뉴스레터에서 '친밀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공간'을 다루는 xR 콘텐츠에서 중요한 것은 혹시 '걷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현실의 공간이든 가상의 공간이든 그것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순간은 '걷고 있을 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뉴이미지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고 있는 권하윤 작가님의 <구보, 경성 방랑>도 그렇고 오늘 간단하게 소개해 드릴 이머시브 전시 <Eternelle Notre Dame>도 경험을 특별하게 만든 것은 바로 '걷는 행위'라는 생각이 듭니다.
<Eternelle Notre Dame>은 라데팡스에 위치한 Grand Arche의 지하에 설치된 프리 로밍(Free Roaming) 콘텐츠입니다. 화재로 소실된 노트르담 대성당을 가상 공간에 복원해 놓은 콘텐츠인데, 건물이 지어지기 시작한 중세로부터 현재까지, 그리고 성당의 각 공간을 걸어 다니면서 세세히 들여다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작품입니다. 프랑스의 통신사 The Orange Group과 Amaclio Production이 함께 만든 야심찬 작품인데, 45분 동안 다섯 명씩 짝지어 다니면서 노트르담 대성당의 여기저기를 느끼는 시간이 상당히 몰입감이 있었습니다. 비 오는 중세의 거리에서부터 화재가 있던 그날 밤까지 '걷다 보면' 과거와 현재, 그리고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흐릿해지면서 색다른 차원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단순히 '관람'한 것이 아니라 '걸어 다녔'기 때문에 그 경험이 생생하게 남게 됩니다.
과거에도 VR 헤드셋을 쓰고 걷는 프리로밍 콘텐츠들이 있었지요. 많은 관심을 받았고 훌륭한 경험을 주는 콘텐츠들이 있었지만, 폭발적인 대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그 사이 작품들은 좀 더 좋아지고 기술도 조금 더 발전했습니다. 팬데믹 이후 이런 종류의 작품들이 다시 선보이고 있는데, 이번에는 얼마나 다른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 궁금해집니다. 한국에서도 노트르담 대성당을 거니는 경험을 하게 될 날이 곧 오겠지요? |